Statement
2025
시린 겨울을 지나며, 생을 지탱하는 것들을 떠올렸다.
물결치는 듯한 거대한 세계 속에서 눈을 돌려 숨을 지닌 다른 존재를 찾으려는 몸짓이, 곧 '살아가는' 일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전시장 곳곳에 흩어놓은 세상의 조각들 사이로, 기대고 안기며 나란히 선 존재들의 모습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 있다.
흐르는, 버텨내는, 이어지는 숨들이 있다.
작년 봄, 서울국제도서전의 리미티드 에디션 도서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게 되어 자유롭게 작업하던 중 디지털 이미지 하나를 그렸는데, 폐허 속에서 작은 생명-따뜻한 숨을 지닌 어떤 것-을 안아올린
여자(아이)의 모습을 담았다. <Hugging> 이라는 제목을 붙인 그 그림에서 작은 생명이 그 몸뚱이를 작은 팔에 온전히 의지한 모습, 그리고 그 몸뚱이를 힘껏 끌어안은 팔이 주는 에너지가 좋았다.
또 그간 반복적으로 이야기해 온, '거대한 세계를 지탱하는 작은 힘'을 잘 설명 해 주는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 서 계속 그 이미지 주변을 맴돌았다.
만들고 그리면서 펴낸 수많은 장면들 속에서 곁을 공유하고 있는 것들을 헤아려 보고자 했다. 어지러운 세상의 장면들 속 잠시 시간을 멈추게 하는 듯한 맞닿음들을 떠올렸다.
머리와 머리, 기댄 어깨, 맞잡은 손, 마주치는 눈, 뒤엉킨 뿌리와 그것을 끌어안은 팔, 아주 가까이 자리한 존재들과 그 사이의 작은 틈에서 만들어지는 온기.
그것을 계속 바라보다 보니, 화면 '너머'에서 힘을 보태는 누군가, 무언가를 상상하게 되었고, 어지럽고 거대하게만 보였던 세상은 그보다 조금은 '소화할 만한 것' 이 되어 다가오기 시작했다.
완전히 홀로인 것처럼 보이는 풍경 속에서 기대고 있는 것들을 찾고- 기대고자 하고- 또 기꺼이 곁을 내어줄 것.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생을 이어가려면 그래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힘. 그것이 <It Takes Two>라 이름 지은 이 전시에서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다.
먹 드로잉 시리즈 <타오르는 세계>에는 파편처럼 흩어진 장면들이 등장한다. 역시 서로 곁을 공유하고 있는 이 그림들은 때로는 하나의 풍경처럼 섞였다가 다시 분리되어 또렷하게 보이기를 반복한다.
그 안에서 태어난 장면들과 이미지들은 또다른 그림과 조각, 애니메이션 속에서 이어 지고, 그렇게 조각과 그림들, 그리고 움직이는 그림(애니메이션) 역시 서로 기대면서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언제나처럼, 뜨겁고 끈적한 숨들이 가장 앞에 서도록 애썼다. 그저 종이에 퍼지는 안료와 겹겹이 뒤엉키는 물감, 진득하게 뭉쳐졌다가도 바스라지는 흙의 순간들에 집중하며,
그 안에서 태어나고 사그라드는 크고 작은 세계들을 찾고자 했다.
날카로운 것을 녹이는 온기들에 집중하면서, 만들고 그리는 일의 본질을 떠올리며 수행적인 태도로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내어주고 기대면서.
글 조윤서, 개인전 <It Takes Two> 를 위해.
2024
그간 비인간 동물을 향한 구조화된 폭력,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숨을 피워냈다가 사그라진 개별 존재들에 집중해왔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그러한 불안정함 속에서도 계속해서 동작하는 세계를 그려낸다. 정지된 땅으로서가 아니라 유기체들 사이사이에서 형성되는 또다른 유기체로서의 세계를 그리며, 그렇기에 함께 일구어 가야 하는 것이고, 연결됨이 없으면 세계 역시 불투명해지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드로잉과 세라믹 작업에서 모습을 드러낸 존재들은 전시장 곳곳에서 연결됨과 분리됨을 반복한다. 또 벽화 작업인<Earthlings(2022)>를 확장하여 재구성한 작업이 중심에 자리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서로를 의지하는, 무언가를 찾는, 끌어안는, 어디론가 향하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2023년 개인전 《Whisper Whisper》에서 드로잉과 회화 작업 속 모습을 드러냈던,
한 뿌리 안에서 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식물들은 이번에는 더욱 큰 존재감으로 화면을 둘러싸며 순환을 이야기한다.
이전 작업에서 계속해서 그러했듯, 여전히, 작은 생명의 심장 박동이나 마주 댄 몸에서 피어나는 온기처럼 작지만 힘있는 것들, 작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찰나의 감각들을 붙들고 내세운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 다른 매체 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피어나는지를 관찰한다.
전시 제목인 <테바 (Tebah)> 는 고대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궤/방주/상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세계는 많은 것을 품고, 동시에 그것들과 함께 움직인다.
In the past I have explored structured violence toward non-human animals and their fleeting lives in their isolated realms. In this exhibition, I portray a more dynamic world that persists despite all the instability. I explore the interconnectedness of organisms emerging within the existing ecosystem, a world far from static. Cultivating this connection together as a community is crucial, as without it the world becomes a blur.
In drawing and ceramic works, the living things that reveal themselves repeat connection and separation throughout the exhibition space.
The work that expands and reconstructs the mural work <Earthlings (2022)> takes center stage, where living things appear relying on each other, searching for something, embracing,
and heading somewhere. The plants that revealed themselves in the drawings and paintings at the solo exhibition 《Whisper Whisper(2023)》, repeating life and death within one root,
now surround the screen with an even greater presence, telling the story of circulation.
Continuing from previous works I highlight small yet powerful things, like the heartbeat of a small life or the warmth that blooms from bodies leaning onto each other, small and fleeting sensations that should not be forgotten. And I observe how this blooms differently across mediums such as drawing, ceramics, prints and animation.
The exhibition title, 《Tebah》, is a word derived from ancient Hebrew and carries the meaning of ark/ship/box.
The world embraces many things, and moves with them.
글 조윤서 Yunseo Jo, 번역 김정원 Jeongwon Kim, 개인전 <테바> 를 위해.
2023
모든 작업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그 안에서 살아 숨쉬는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주로 비인간 동물로 대표되는 존재들을 통해 지금의 시간 속에서 너무도 쉽게 사그라지는 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틈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생의 아름다움과 끈질긴 생명력에, 지독함에 가까운 그 감각에 집중하며 솟아나듯 발생하는 느낌들을 드로잉과 세라믹, 애니메이션 등의 매체를 통해 담아낸다.
매일같이 손을 움직이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과 끈질기게 얽히려는 몸짓이자 내가 마주하는 세상에 대한 꾸준한 반응이다.
작업 과정에서 이어지는 나의 호흡을 통해 다른 존재의 호흡을 떠올리며,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한다.
흙을 통해 상징들을 만들며 존재들을 지금 이 자리로 불러내기를 시도하고, 물질이 간직하고 있던 숨이 자연스럽게 퍼져 나오는 것을 경험한다.
또 드로잉 애니메이션 속에서 각각의 프레임 위에 그린 존재들을이어 붙이며 다시금 숨쉬고 움직이도록 한다.
이때 흙 위에서, 종이 위에서, 화면 위에서 쉬지 않고 이어지는 손의 움직임은 사라진 숨들을 위한 일종의 애도의 몸짓이자 마주할 힘을 얻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다.
전시 제목인 <Whisper Whisper> 는 ‘속삭이다/속삭임’이라는 의미의 ‘Whisper’를 두 번 이어 부른 것으로, 속삭이듯이 내게 왔던 강렬한 이야기가 또다른 속삭임으로 다가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 뿌리 안에서 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거대한 식물과, 산을 들어 옮기고 손을 맞잡은 채 회복의 춤을 추는 거대한 존재들의 이미지는 뜬장 속 모견과 가죽만 남은 돼지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장면들과 섞이며 뒤엉킨 풍경을 만들어낸다. 또 전시장 곳곳에 신화적 요소를 지닌 채 자리한 개들의 형상은, 위압감을 주는 신상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이야기를 건네는 전달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여러 존재들의 속삭임으로 가득한 이곳이, 머무는 시간 동안이나마 모든 존재를 향한 환대와 연결의 장으로서 일해주기를 바란다.
글 조윤서, 개인전 < Whisper Whisper > 를 위해.
2022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6억 1900만 명이다.
우리는 사흘마다 그만큼의 동물을 죽인다.
-다큐멘터리 영화 <Dominion (Chris Delforce, 2018)>
오래 전부터 비인간동물들이 좋았다.
움직이는 모양부터 살아가는 방식까지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들을 영원히 바라봐도 좋을 것만 같았고, 만들고 그리며 그 사랑을 표현해왔다.
비인간동물들의 숨이 너무나도 쉽게 꺼져가는 지금의 시간 속에서 ‘그 사랑’은 너무나 안일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 마음은 부지런히 헤매며 나아갈 바를 찾고 있다.
나의 모든 작업은 그 헤맴의 흔적들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수많은 비인간동물들은 자연의 고리 대신 대량 생산과 도살의 고리 안에서 호흡하지 않는 사물처럼 다루어진다. 사육틀, 철창, 케이지 속의 그들을 만들고 그리는 것은
참혹한 장면들 속에서 읽은 표정들과 몸짓을 대하는 마주하기 방식, 어쩌면 ‘마주하기 버거운 그 잔상들을 견뎌내는’ 방식이다.
또한 생에서 죽음까지 너무 짧은 시간 동안 존재했던 그들을 붙잡아두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작업 안에서 이어지 는 나의 호흡을 통해서 다른 존재의 호흡을 떠올리고,
그때마다 내가 거대한 고리 안에 서 숨쉬고 있는 아주 작은 존재임을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마주하기를 시도할 수 있는 용기로 이어진다.
나의 작업 안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비인간동물들 의 형상은 분명 일어나고 있지만 가려진 폭력의 장면들, 의도적으로 숨겨진 착취의 장면들을 끄집어내는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비인간동물들의 재현이 지녀 온, ‘(다른 생김새를 가진) 소유하고 싶은 매력적 대상의 이미지’로서의 효과를 -의도치 않게- 드러내며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킨다. 그 충돌을 적극적으로 타고 올라
그 너머의 것들을 계속해서 가져오고자 한다.
즉각적인 반응으로서의 드로잉과 조각이 작업의 주를 이룬다. 수행적인 태도로 손을 움직여 존재들을 불러오고, 그로부터 숨이 생겨나는 과정을 경험한다.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을 통해 되살리기를 시도하는데, 한때 숨을 지녔었지만 무참히 사그라지고 잊힌 존재들을 다시 불러낸다.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을 그려서 이어 붙여 다시 숨쉬게 만드는 것은
각각의 생을 세려는 노력이며, 이는 곧 애도의 행위로 이어진다. 물질과 의 접촉 또한 멈추지 않는다. 숨을 간직한 철과 흙으로 상징들을 만들며 물질들이 지닌 치유의 힘, 응축된 에너지를 옮겨오려 한다.
지나간 시간 속, 또 나와 멀리 떨어진 곳의 시간 속 존재들을 불러와 연결짓기를 시도한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존재들의 이미지와 뒤섞이며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비인간동물들로 대표되는 나의 작업은 결국 모든 살아 숨쉬는 것들로 통하는 이야기이다. 나를 이 거대한 이야기에 끌어들였던 에너지는 살아 숨쉬는 생명들로부터 나오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닫힌 이야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확장될 이야기이다. 그 안에서 내가 붙들고 내세우는 것은 작은 생명의 심장 박동처럼 작지만 힘있는 것들, 잊어서는 안 되는 찰나의 감각들이다.
폭력의 상흔들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그러한 찰나의 감각, 그처럼 빛나는 순간들을 한 자리에 제시한다. 이 모든 바람들이 모여 노랫소리처럼 퍼져 모든 것을 연결지어 주기를,
그리하여 처음 이 세계가 만들어졌을 때의 모양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작업을 이어간다.
글 조윤서